라벨이 한국사 1급인 게시물 표시

[조선직장인의노하우] 1955~2000년대까지 한국사 사건 요약정리

이미지
 한능검(한국사능력검정시험) 현대사 파트의 마지막 대단원이자, 매회 3~5문제가 고정으로 출제되는 1955년부터 2000년대까지 의 핵심 흐름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조선직장인의노하우] 1945~195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 사건 요약정리

 1. 1945년 ~ 1947년: 해방과 좌우의 갈등 해방의 기쁨도 잠시,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두고 국내외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한 시기입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여운형 중심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 결성.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신탁 통치 결정 소식에 국내가 찬탁(사회주의 계열) vs 반탁(민족주의 계열)으로 나뉘어 극렬히 대립했습니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했으나 결렬되었습니다.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 발언 "남측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우자"는 폭탄 발언이 나왔습니다. 1946년 7월: 좌우 합작 운동 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며 노력했습니다. 1947년: 한반도 문제 UN 이관 미·소 공동 위원회가 최종 결렬되자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넘어갔습니다. 2. 1948년 ~ 1949년: 정부 수립과 시련 한반도 이남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아픔이 담긴 시기입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되었습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으로 건너가 김일성을 만났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사료 주의!) 1948년 5월 10일: 5·10 총선거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 보통 선거입니다. 제주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실시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49년: 반민특위 활동 & 농지 개혁법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활동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해체되었습니다. 반면, '유상 매수 유상 분배' 방식의 농지 개혁은 성공적으로 평가받습니다. 3. 1950년 ~ 1953...

[조선직장인의노하우] 1931~1945년 한국사 사건 요약정리

이미지
한능검(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마지막 관문이자 가장 가슴 뜨거워지는 구간,  1931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의 흐름을 정리해 드릴게요. 이 시기는 일제의 광기 어린 '민족 말살 통치'와 이에 맞선 우리 민족의 '최후의 결전 준비'가 핵심입니다. 1. 1931년 ~ 1936년: 침략의 확대와 의열 투쟁의 재점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며 전쟁의 서막을 알린 시기입니다. 침체되었던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의거'들이 핵심입니다. 1931년: 만주 사변 & 한인 애국단 조직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김구 선생은 상하이에서 한인 애국단 을 결성하여 침체된 임시 정부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합니다. 1932년: 이봉창 & 윤봉길 의거 이봉창 :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미수). 윤봉길 :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성공. ➡️ 중국 국민당이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 하게 된 결정적 계기입니다. (한능검 빈출!) 1933년: 조선어 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총 칼 대신 '글'로 민족 정신을 지키려 했던 문화적 저항입니다. 1935년: 민족 혁명당 결성 김원봉 주도로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하나로 뭉친 좌우 연합 정당입니다. 2. 1937년 ~ 1940년: 민족 말살 통치와 전시 동원 체제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일제가 우리 민족을 전쟁의 도구로 쓰기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아예 지워버리려 한 암흑기입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강요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우리는 천황 폐하의 신하입니다"라는 서사를 강제로 외우게 했습니다. 1938년: 국가 총동원법 제정 중요! 인적 자원(징용, 징병)과 물적 자원(공출) 수탈의 법적 근거가 된 악법입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충칭에 정착하며 만든 정규군입니다. 지청천 총사...

[조선직장인의노하우] 1921~1930년 한국사 사건 요약정리

이미지
한능검(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을 노리는 수험생들에게 이 시기는 '실력 양성 운동 vs 사회주의 운동'의 대립과 통합 , 그리고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 통치 를 파헤치는 아주 중요한 구간입니다. 그래서 한능검 기출 포인트만 쏙쏙 뽑아 1921년부터 1930년대 까지 정리해 드릴게요.  1. 1921년 ~ 1925년: 시련과 사회 운동의 확산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이 다양해지며, 국내에서는 실력을 키우자는 움직임과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간도 참변 이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던 독립군들이 지휘권 문제로 소련 적군에 의해 무장 해제당하며 큰 희생을 치른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1923년: 밀립 대학 설립 운동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씩 1원씩"이라는 구호로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일제가 경성제국대학(1924)을 세우며 방해해 실패했습니다. 1923년: 관동 대지진과 한국인 학살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혼란 속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많은 한국인을 학살했습니다. 1925년: 치안 유지법 공포 시험 단골 문제! 일제가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법이지만, 사실상 모든 독립운동가를 잡아넣는 전천후 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2. 1926년 ~ 1929년: 민족 유일당 운동과 대규모 저항 이 시기의 핵심 키워드는 '좌우 합작'입니다. 이념을 넘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합니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순종의 인산일(장례식)을 기해 일어났습니다. 3·1 운동만큼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7년: 신간회 창립 별표 5개! 한능검 무조건 출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결성한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 입니다. "기회주의(자치론자) 배격"이 핵심 강령입니다.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한일 학생 간의 충돌로 시작...

[조선직장인의노하우] 1911~1920년 한국사 사건 요약정리

이미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준비를 위해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핵심 흐름을 정리해보았어요! 이 시기는 '무단 통치기(1910년대)'에서 '문화 통치기(1920년대)'로 넘어가는 거대한 전환점이라 보시고 접근하면 좋을 것 같아요!!  1. 1910년대: 헌병 경찰의 '무단 통치'와 국권 회복 노력- 1910년대는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속에서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실력을 양성하고 비밀리에 독립을 준비하던 시기입니다. -1911년: 105인 사건-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들을 대거 체포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신민회가 해산되었지만, 독립운동의 중심은 만주 등 국외로 이동하게 됩니다. -1912년: 토지 조사 사업 실시- "기한 내에 신고하라"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넘긴 경제 침탈의 핵심입니다. 1912년 8월 토지조사령 공포로 토지조사사업을 촉진하고 신고 제도를 강화하였습니다.  -1912년: 독립 의군부 조직-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조직한 복벽주의(왕정을 다시 세우려는 주의) 성격의 국내 비밀 결사입니다. -1915년: 대한 광복회 결성- 박상진 등이 대구에서 결성한 단체로, 독립 의군부와 달리 공화정을 지향하며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금에 힘썼습니다.  2. 1919년: 우리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 3·1 운동과 임시 정부 1919년은 시험에서 단독 문제로 무조건 출제되는 해입니다. -1919년 2월: 2·8 독립 선언 (도쿄)- 일본 유학생들이 발표한 선언으로, 3·1 운동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3·1 운동 발발-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과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입니다. 일제는 제암리 학살 등으로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일제의 통치 방식을 '문화 통치'로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상하이)- 3·1...

[조선직장인의노하우] 1900~1910년 한국사 사건 요약정리

이미지
비교적 비중 있게 다뤄지는 1900년~1910년 사이의 핵심 사건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1900년 ~ 1903년: 폭풍전야와 열강의 대립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참가 대한제국이 'KOREA'라는 이름으로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참가했던 해입니다. 1902년: 제1차 영일 동맹 영국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는 한반도 운명에 먹구름을 드리운 사건입니다. 1903년: 용암포 사건 러시아가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점령하면서 러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 1904년 ~ 1905년: 러일 전쟁과 외교권 박탈 이 시기는 시험이나 블로그 포스팅에서 가장 강조되는 '국권 침탈'의 본격적인 시작점입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 한일 의정서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하며 전쟁이 터졌고, 강제로 대한제국 영토를 군사 기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 고문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재정 고문 메가타, 외교 고문 스티븐스) 1905년: 을사늑약 (제2차 한일 협약) 가장 중요한 사건 입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 1906년 ~ 1908년: 저항과 탄압의 가속화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며 내정 간섭이 심해졌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를 보냈으나 실패했습니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 군대 해산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일본이 고종을 물러나게 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이에 반발해 정미의병 이 일어났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우리나라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경제 침탈 기구가 만들어졌습니다. 🗓️ 1909년 ~ 1910년: 마지막 불꽃과 경술국치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단...

[조선직장인의 노하우]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종묘에 관하여

이미지
 [종묘] 종묘 정전은 1395년 태조가 창건한 조선 왕실의 최고 제례 공간으로  국보 제227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2020~2025년 사이 목재, 기와, 구조 안정성 문제로 대대적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왕·왕비 신주 49위는 창덕궁 구 선원전에 임시 봉안하였고, 공사 완료 후 다시 종묘로 모셔 ‘환안제’ 를 치뤘다.  *환안제: 다른 곳으로 옮겼던 신주를 다시 제자리로 모실 때 행하는 제사  세계유산위원회( UNESCO )는 종묘제례악과 더불어 종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왕실 제례시설 + 제례 의식 + 제례악이 동시에 전승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   - 왕실의 선대 왕·왕후에게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 의례 - 유교적 충·효 사상과 국가 운영 철학이 집약되어 있음 - 매년 봄과 가을,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대제가 봉행됨 - 조선시대 실록과 의궤에 기록된 의식이 현재까지 거의 동일하게 전승 제례 순서: → 전폐례(신에게 제향을 고함) → 초헌례(임금이 첫 잔 올림) → 아헌례, 종헌례 → 철변두례 등 - 제례에 사용되는 제수·절차는 조선 시대 규범인 《국조오례의》에 근거 <종묘제례악의 유네스코 가치> - 종묘제례 중 연주되는 제례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궁중 음악 체계 중 하나 - 악기 편성은 편종·편경·특경 등 동아시아 고대음악 전통을 잇는 악기들이 포함 - 춤(일무)과 음악(아악)이 결합된 형태로,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다르게 구성 - UNESCO는 2001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 음악·의식·춤이 한 세트로 보존된 유례없는 사례 <종묘의 구조적 특징 및 배치(건축사적 가치)> - 종묘는 "정전(정궁)"과 "영녕전(별묘)"의 이원 체계로 구성됨 - 정전: 역대 왕·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본전 - 영녕전: 종친 및 초기 왕실 선대의 신주를 모시는 별도 공간 - 정전의 규모는 길이 109m로, 단일 목조...

[조선 직장인의 노하우] 일제강점기 조선교육령과 우리의 교육 현실

이미지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한국의 교육은 식민지 통치 도구로 변질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조선교육령"이라는 법령을 제정하여  교육 체계를 통제했는데,  이는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 한국인을 ‘황국신민(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 제1차 조선교육령 (1911년)  - 초등교육기관을 "보통학교(4년제)"로 개편  - 중등교육은 일부 학교 신설, 고등교육기관은 설치 불허  - 목적: “충량한 국민 육성”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순종적 식민지 백성 양성  -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으로 선회하며 보통학교 수업 연한을 6년으로 늘림 * 조선인을 최소한의 지식만 가진 ‘순종적 노동자’로 키우려는 정책이 특징적임 □ 제2차 조선교육령 (1922년)  - “일시동인(一視同仁)”을 내세워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같은 교육을 표방  - 그러나 실제로는 동화정책으로, 일본 제도에 맞추어 조선을 흡수하려는 의도  -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여자고등보통학교 4~5년으로 개편  - 대학 설립 규정 신설 → 1924년 경성제국대학 설립 * 조선의 교육 인프라를 확충했지만, 본질은 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인재 양성이 특징임  □ 제3차 조선교육령 (1938년)  - 배경: 중일전쟁(1937) → 조선을 병참기지화  - 학교 명칭 통일: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  -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격하  - 황국신민화 교육 본격화 (천황 숭배, 일본어 사용 강조)  - 1941년 개정: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편, 교과목을 일본식으로 통합 * 본격적인 전시 동원 체제에 맞춘 교육. 언어와 사상까지 일본에 종속시킴 □ 제4차 조선교육령 (1943년)  - 배경: 태평양 전쟁 심화 → 전...

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약정리 8 (조선시대 행정조직)

이미지
 - 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약정리 8 (조선시대 행정조직) - 1. 중앙행정조직  [중앙] 1) 의정부 : 국정 최고 회의 기구. 국왕 보좌. 2) 6조 : 실질적 행정 담당.  - 이조 : 관리 임명·승진 등 인사권  - 호조 : 조세·재정·호구 파악  - 예조 : 외교, 교육(과거), 종교·제례  - 병조 : 군사·병력 관리  - 형조 : 법률·재판·형벌  - 공조 : 건축·토목·기술 관리 3) 삼사 : 언론 기능, 왕과 대신 견제 4) 승정원 : 왕명 출납, 국왕의 비서실 5) 의금부 : 국왕 직속 재판기관, 반역 사건 담당

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약정리 7 (발해 주요왕들)

이미지
 [발해의 주요왕들] 고왕(대조영, 698~719) -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 - 처음 국호는 ‘진국’이었으며, 이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아 국호를 발해로 사용 - 독자 연호 ‘천통’을 사용함 무왕(대무예, 719~737) -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당의 산둥 반도를 선제공격(732년)하며 대당 강경책을 펼침 - 부여·옥저 등 고구려 옛 땅을 회복했고, 흑수말갈을 압박하며 세력을 북쪽으로 넓혔음  - 돌궐·일본과 우호, 신라·당과 대립 - 연호 ‘인안’을 사용 문왕(대흠무, 737~793) - 당과 친선관계를 맺고 3성 6부제, 주자감 등 당의 제도를 수용 - 상경 천도 등 수도 체계를 정비 - 신라와 상설 교통로 ‘신라도’를 개설 - 연호 ‘대흥’, ‘보력’을 사용함  선왕(대인수, 818~830) -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북만주·연해주 등 영토를 크게 확장해 ‘해동성국’이라 불림 - 5경 15부 62주의 지방 조직을 완비 - 당의 빈공과에서 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문물이 번성하였음  애왕(대인선, 901~926) - 거란(요)의 침입으로 926년 발해 멸망 https://juniors-dream.blogspot.com/2022/10/koreahistory6.html

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약정리 5 (강화도 조약과 그 이후 )

강화도조약 부속조약 (조일수호조규부록, 1876) 1.개항장 내 일본화폐 사용 2.거류지 무역 (개항장 내 활동범위 10리) 3.조선상인 매개 중개무역 4.수출: 쌀(지주 이익), 콩, 쇠가죽 5.수입: 영국산 면직물 (조선 수공업 타격받음) 임오군란 (1882)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조일강화조약)과 동시에 조일수호조규속약 2개조를 맺게 된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제물포조약 (조선 측의 5만 원 배상, 일본 공사관의 일본 경비병 주둔,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를 위한 수신사 파...

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약정리 4 (우리나라 개헌 역사)

 제헌헌법  1 공포일 : 1948년 7월 17일  2 주요내용 : 대통령 간선제, 1회에 한하여 중임 허용, 기미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 명시, 삼권분립 명시, 대한민국 부통령제, 통제계획경제, 임기 4년 단원제 국회, 임기 4년 대통령제, 반민특위 부칙, 탄핵위원회 설치, 헌법위원회 설치, 국무원 설치 제 1차 개헌 (발췌 개헌)   1 공포일 : 1952년 7월 7일 2 주요내용 :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사실상 단원제), 국무원불신임제 3 비고 :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을 철폐하기 위한 포석, 자유토론 억압, 헌법의 체계정당성 무시, 계엄 및 위협분위기 속 강제통과, 헌법에 정하는 바 공고절차 및 독회(讀會)절차 생략 등 문제 발생  제 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1 공포일 : 1954년 11월 29일 2 주요내용 :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 3선 연임 제한 철폐, 주권 및 영토 변경 시 국민투표 도입, 국무총리제 폐지, 헌법개정의 국민발안제 및 한계조항 신설, 군법회의의 헌법적 근거 명시,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 지위승계제 3 비고 : 초대 대통령 독재를 위한 포석, 사사오입에 의한 절차적 법원리 무시, 국회표결 의장의 표결 결과 선포 번복 문제 발생 제3차 개헌 (제2공 개헌) 1 공포일 : 1960년 6월 15일 2 주요내용 : 의원내각제, 대통령 5년 중임제, 헌법재판소 설치, 대법원장 및 대법관선거제, 기본권 침해 금지 조항 명시, 선관위의 헌법적 지위 강화, 공무원 및 경찰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제도화, 언론검열 금지, 지자체장 선거제, 양원제(민의원+참의원), 헌정사 최초 합법적 개헌 3 비고 :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진 후 시행한 개정이나 3.15 부정선거에 대한 언급 없음, 4차 개헌의 빌미가 됨 제4차 개헌 (소급입법 개헌) 1 공포일 : 1960년 11월 29일 2 주요내용 : 반민주행위자(3.15 부정선거 자유당 협력자) 처벌규정, ...

조선직장인의노하우_광복절 (8.15)

  [8·15광복] ​ 8·15광복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사건이다. 국권이 강탈된 후 민족독립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한 모색과 진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은 연합국 측의 승리에 힘입은 바가 컸고 냉전질서가 심화되면서 남과 북에 체재를 달리하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이 분열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군국주의적 일제의 침탈로 국가 재건은 거의 폐허에서 시작되었고, 정치·문화적 침탈도 심각하여 일제 잔재 청산 노력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을 정도이다. [8·15광복 당시 상황] 1945년 8월 15일 오전 12시 정각.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라디오 방송이 흘러 나왔다. 이 당시 일본 천황의 항복에 관한 방송은 황족어로 발표되었고, 라디오의 음질 불량으로 정확히 전달된 것은 아니었다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항복 직후 모두가 나와 만세를 부른 것은 아닌듯 하다. ​ 하지만 일본 항복을 미리 알고 있던 조선 총독부는 8월 15일 여운형과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목적은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80만 가량의 일본인들의 안전 귀환이었다. 여운형은 이때 조선총독부를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말하게 된다. 정치범 석방 3개월분의 식량 확보 치안 유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간섭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와 농민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등 8월 16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민중들도 광복의 소식을 알게 되었고, 여운형의 주도로 정치범들의 석방과 본격적인 광복의 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8·15광복 이후 국내 정치 상황] 여운형, 안재홍 등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건국강령을 발표함 ​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