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약정리 3 (신라시대 대표 스님)

 - 혜초(慧超/惠超, 704년~787년)-

신라의 고승으로, 787년에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인도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 발견되어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

혜초가 언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20대가 되자마자 723년에 당나라의 광저우에서 시작해 수마트라와 스리랑카, 인도 전역과, 북서부 이란(니샤푸르),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 부근 그리고 카슈가르라 불리는 카슈가르(喀什, 그 당시의 소륵국(疏勒國))와 이곳 쿠차(庫車, 그 당시의 구자국(龜玆國))를 마지막으로 하는 그의 8년간의 여행기를 기초로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왕오천축국전》의 내용대로라면, 혜초는 한반도 태생의 사람으로는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다녀온 사람이다.


- 자장(慈藏, 590년~658년)-

신라의 스님이었고, 율사(律師)로 알려져 있다. 출가하기 전에는 진골 출신의 귀족이었으며, 성은 김(金), 속명은 선종(善宗)이다.

불교가 신라 국교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특히 계율(戒律)을 중시하고 강조하였는데,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려들의 규범을 정하고 지키도록 하면서 불교 교단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 건립을 주도하면서 신라가 불국토(佛國土)라는 관념을 널리 퍼뜨려, 불교를 호국 이념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 원효(元曉, 617년 ~ 686년) -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학자, 사상가, 작가, 시인, 정치가로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겨 불교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저술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등이 있고, 이 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은 중국의 고승들도 ‘해동소(海東疏)’라 칭하며 즐겨 인용되었다. 특히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해 주석을 한 것으로, <삼국유사>에도 ‘삼매경소(三昧經疏)’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광(圓光, 542년~640년)-

 신라의 승려이다. 세속에서의 성은 박씨이다. 중국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이름이 높았던 원광은 신라로 돌아온 후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 ·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하였다.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 진평왕 30년(608년)에는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 의상(義湘, 625년~702년)-

 신라 중기의 왕족 출신 고승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화엄종 제2대 조사인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유학 후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을 전국에 세웠고 화엄경을 강론하며 3000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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