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 8/15 _ 광복절 역사

- 8/15 광복절 -

1943년 11월 말에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였고, 7월 26일을 시작으로 8월 8일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청진시에서는 아직까지도 소련과 일본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계속 하고 있었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으로, 그리고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되어 여운형이 연설한 해방집회를 하였으며,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으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8월 17일까지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경술국치를 재확인하여 결국 일본과 단절되었다.

- 카이로선언 : 1943년 11/23~11/26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이 회의를 진행했고, 이를 12/1에 발표한 공동 선언.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전쟁 뒤의 일본 점령지의 반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한국의 독립과 만주ㆍ대만의 중국 귀속을 약속

-포츠담 선언 : 1945년 7/26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이 일본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한국문제와 관련해서는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재확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인 서울 필동의 한국의 집에서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그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와 교섭을 벌여 5개 조항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하였다.

1.전국적으로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1945년 9월 9일 서울의 옛 일본 정부 청사에서 미군들이 일장기를 내리고 있었다.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러나 라디오로 방송된 문장과 개요가 당일의 신문에 기재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패전을 이해했으며 한민족은 거의 조선(대한)독립만세 시위가 없었으며, 여운형이 조국의해방집회를 연설했다.

그 사이에 소련은 일본 제국과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얘기상 8월 15일 여운형과 문제안이 서로 전화하고 대화하면서 그 과정에 오후 4시 30분쯤에 조선 조선에서 최초의 안재홍과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을 통해 전개된 군정에 따라 구 대한제국 지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으로 공산주의 체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으며, 이후 양측 모두 이 날을 기념하지만 구체적인 의미가 크게 다르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아울러 광복으로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 해방의 날(祖國 解放-)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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