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점정리 (17)_ 조선(문종, 단종 그리고 계유정난)

 문종(재위 1450~1452) 

- 1450<동국병감>, 1451<고려사>, 1452<고려사절요> 편찬

- 병제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이고, 병력을 증대 6품 이상까지의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의 말까지 경청 열린 정책

 

단종(재위 1452~1455) 

- 계유정난의 발발(1453)과 폐위(1455)

 

계유정난 :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1452(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한 이후 좌의정은 김종서, 우의정은 정분(鄭笨)이 맡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을 궐문(闕門)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 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10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이사철(李思哲) ·박종우(朴從愚) ·이계전(李季甸) ·박중손(朴仲孫) ·김효성(金孝誠)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한명회(韓明澮) 37명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유정난 [癸酉靖難]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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