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점정리 (4)

 한국사 시험준비에 이어 

한국사 문제를 풀면서 배경지식이 될 만한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알고 있겠지만 출제된 문제를 바탕으로 관련 배경지식이 될 만한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가볍게 상식을 늘린다는 관점에서 

책 읽듯이 읽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다. 



동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227~247년이며 산상왕의 아들이다. 재위 전반기에는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손씨와 계속 대립하다가 238년에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본래의 낙랑군 관할지역을 다시 확보하려던 위의 동방정책과 부딪히게 되었다.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일시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밀우·유유 등의 활약으로 그들을 몰아내었다. 동천왕이 승하하자 왕의 은덕을 사모한 많은 백성들이 따라 죽었다고 한다.

-고구려-

 

558년 백제 성왕은 사비로 수도를 옮긴다. 이때 사비는 계획도시였다. 사비 도성 북쪽과 동쪽에는 각각 부소산성과 나성(羅城)을 높게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부여 나성 발굴 과정에서는 성의 북문 터가 확인되었다. 부여 나성은 백제 사비 도성을 감싸는 방어 시설로 충분하였다

 -백제-


살수 대첩(薩水大捷)612(영양왕 23) 2차 여수 전쟁에서 고구려의 승리로 장식한 살수(청천강)에서의 전투이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했던 수나라의 별동대가 살수에서 강을 건너 돌아오던 중 을지문덕의 습격을 받아 궤멸한 전투이다.

 -고구려-

 

대야성(大耶城) 전투는 642년에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 대야성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와 신라의 전투를 말한다.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한층 강화하였던 백제는 대야성을 함락함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빠트렸다. 반면, 당시 신라의 권력자였던 김춘추는 대야성이 함락될 당시 성 안에 있던 자신의 딸과 사위를 모두 잃고 복수심에 불타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당을 오가는 외교전을 펼치게 되었고, 결국 김춘추의 대당(對唐) 외교가 성공함으로써 신라와 당은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바야흐로 삼국의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순간이다.

 -백제-

 

660년 계백은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진을 친다. 이때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을 맞이하고, 하루 동안 4번의 전투가 이어졌고, 모두 격퇴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은 5천 결사대는 거의 전멸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당나라군과 신라군의 협공을 받아 함락되었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부하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인해 사로잡히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 


660년경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자 흑치상지는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연로한 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가혹하게 약탈하자, 이를 두려워한 흑치상지는 추장 10여 인과 함께 도망하여 임존산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열흘 만에 휘에에 3만여 명이 모였으며 곧 200여 성을 되찾았다. 소정방이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백제 부흥운동-

 

안승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고구려가 668년 멸망한 이후 검모잠 등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고구려의 비정통 군주로 추대되었고,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주도했으나 당나라의 군대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하면서 결국 실패했다. 이후 남쪽의 신라로 달아나서 보덕국의 국왕이 되었고, 나중에는 신라의 귀족이 되면서 완전히 신라에 편입되었다.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 기관(軍政機關). 안동도호부는 안북(安北)·선우(單于)·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도호부와 함께 6개의 도호부를 구성하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는데,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무렵 검모잠(劒牟岑)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당에 대항하고, 한편 신라가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당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은 670년에 도호부의 치소(治所)를 신성(新城 만주 무순 서쪽)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뒤 신라와의 전투에서 잇달아 참패한 당은 676년 2월에 한반도를 포기한 채 도호부의 출정 본부를 요동성(만주 요양)으로 옮겼다. 이때 부치(府治)를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에게 요동 도독의 직책을 주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으로 보내어 자치를 허락하게 됨에 따라 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그 뒤 697년에 당의 요동 지배의 일대 근거지였던 영주(營州)가 거란인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당의 안동도호부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더욱이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를 건국하게 됨에 따라 그 직접적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은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로 하여금 만주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 방침을 채택하여, 일단 도호부를 폐지하고 699년에 안동도독부를 두어 고덕무를 안동 도독에 임명하였다. 그뒤 704~705년경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도호부는 부치(府治)를 714년에 평주(平州)로, 다시 734년에는 요동군으로 옮겼는데, 그 임무는 설치 당시의 고구려 유민에 대한 감시로부터 말갈족 견제로 변경되었으며, 차차 도호부 자체의 실권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에는 폐지되고 말았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나름 과거 출제된 문제를 기반으로

시대별 사건을 정리해 보려 했는데 중간중간 빠진 사건들이 많은 것 같다.

이부분은 또 다른 기출문제 확인하면서 추가적으로 배경이 될 만한 사건을 조사해서 

공유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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