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점정리 (7)_ 신라(문무왕, 신문왕, 성덕왕)

통일신라 시대 왕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신라의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대적 흐름을 바탕으로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30대 국왕 : 문무왕(재위 661~ 681)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는 백제 영토를 5등분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로 나누어 통치.

백제 유민들은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가 무단으로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며 무자비한 통치를 실시하자 이에 반발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킴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백제 유민들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백제 영토를 귀속시켜 나갔고, 백제부흥운동 진압을 통해 직접 귀속한 영토에 살고 있던 백제 유민들에게 유화책을 펼침으로써 백제계 주민들의 민심을 포섭해 나감

당나라는 백제부흥운동 토벌과 고구려 정벌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일단 신라가 백제 땅을 직접 영토로 귀속하는 것을 묵인했고, 결국 663년 당나라는 5개 도독부 중 웅진도독부를 제외한 나머지 4개 도독부를 폐지시키게 됨

663년 백강 전투 이후 백제부흥운동이 완전히 진압되자 당나라는 신라까지 먹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663년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신라에 계림대도독부 설치를 통보하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665년 이미 멸망한 나라인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취리산에서 문무왕과 회맹을 맺게 함

한편으로 문무왕은 기존 고구려계 주민들을 포섭을 시도했고, 이때 고구려 검모잠과 안승은 당나라를 몰아낸다는 목적으로 신라에 먼저 접근해 왔다. 문무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신라에 형식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관계를 맺는 대가로 군량미 등 전쟁 물자와 군사 지원군을 지원하고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합동 작전을 함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나라가 요동 이서로 철군했고, 11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 보덕국 사신을 같이 데리고 가서 보덕국(고구려 유민의 나라, 지금의 익산지역)이 신라의 속국임을 명확히 함

679년 탐라국을 침략하여 다스렸으며, 월지(안압지) 부근에 동궁을 건설

 

31대 국왕 : 신문왕(재위 681~ 692)

 

삼국통일 이후 강화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토대로 왕권을 전제화함

신문왕을 김흠돌의 모반 사건(681)을 계기로 귀족세력 숙청

13개 중앙 관부의 마지막 관부인 예작부(공부)를 설치하고, 95소경 체제의 지방행정 조직과 9서당 10정의 군사조직 정비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687)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 폐지(689)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682)

 

33대 국왕 : 성덕왕(재위 702~ 737)

 

당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사신을 빈번히 보냄

714년 통문박사라는 대당 외교문서 담당 기관을 만들었으며, 신문왕 때 설립한 국학의 내실을 보강하기 위해 당나라의 국학 문화 수용

722년 정전제도 실시하였고, 이는 실제로 국가의 토지를 수여한 것이 아니라 자영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많은 세를 거둬들일 수 있게 되어서 국가 재정의 안정을 가져옴

718년 한국사 최초로 물시계 설치, 관련 부서를 설치하는 등 실용적 학문진흥에 관심을 둠

성덕왕은 전제 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명군으로 평가받아 그의 아들 경덕왕(35)이 그의 아버지의 명복과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만들기 시작하여 771(혜공왕 7) 만들어졌고, 오늘날 국보 29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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