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의 한국사] 요점정리 (10)_ 고려(성종, 목종, 현종) / 여요전쟁

 6대 성종 (재위 : 981-997) 

-최승로의 시무28조 건의 수용 (유교중심, 중앙집권적 통치)

-불교행사인 연등회 축소, 팔관회 폐지

-12목에 지방관 파견(983)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세력 견제

-국자감 정비

-지방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 진흥 노력

-과거제도 정비 및 과거출신 우대

-26부제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제 마련

* 26*


 

7대 목종 (재위 : 997-1009) 

-개정전시과: 분급기준이 관품(官品)과 인품(人品)이던 시정전시과와는 달리 관품으로 단일화하였다. 즉 개정전시과에서는 공복이나 관계뿐 아니라 인품이라는 막연한 요소를 배제하고 오직 관직의 고하에 따라 18()로 구분하여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학문을 장려함 


8대 현종 (재위 : 1009-1031) 

-4도호부 8, 5도양계

-주현공거법: 향리의 자제에게 과거 응시자격 부여

-거란의 침략으로 나주로 피신

-귀주대첩(강감찬)

-초조대장경 간행

 

여요 전쟁

1차 전쟁

거란은 916년 나라를 세운 지 10년만인 926년에 만주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발해를 공격해 무너뜨려 만주 지역을 장악한 후 곧이어 인접한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942년에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을 이룩하며 고려의 위치를 굳건히 한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로 인식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모조리 유배보내고, 낙타는 모두 개성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 만부교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고, 고려에서는 태조 이래로 거란에 대한 적대노선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아직 이때까지는 본격적인 전란으로까진 이어지지 않았는데, 거란 입장에서는 중원에 자리하고 있던 송나라를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후방의 안정을 도모해야 했고, 아직 정안국 같은 발해 부흥 세력들도 거란을 상대로 저항하고 있던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후방에 있는 고려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고려는 당시 멸망한 발해의 잔존세력을 계속해서 흡수하여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므로 그들 때문이라도 정치적 역학관계상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려는 이후에도 북진 정책과 왕건의 훈요 10조를 충실히 따라 거란을 배척하는 한편 송(북송)과의 친선을 도모했고 광종대인 960년에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통교하기 시작했다. 이 때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북방에 주둔 중이던 거란에 대한 경략을 시도했고,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인 정안국도 송나라와 화친하면서 거란에 대항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986년 정안국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멸망시키고는 만주 전체를 장악한 다음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요구해왔다. 결국 993,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서희의 외교 협상을 통해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쪽 일대인 강동6주를 얻게 되었다. 어쩌면 소손녕은 송과의 전쟁때 고려가 후방에서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온 것이지 실제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2차전쟁

1차 고려-거란 전쟁 이후 고려와 거란은 한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긴장 관계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거란은 송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압박했고, 마침내 1004(목종 7)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거란 황제인 성종(聖宗)과 그 어머니인 실권자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직접 대군을 끌고 나선 친정(親征)이었다. 거란군은 무서운 기세로 송군을 격파하며 진격하여 수도인 개봉(開封) 인근의 전연(澶淵)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화의를 맺었으니, 바로 전연(澶淵)의 맹약이라 불리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조약이다. 그 결과 송은 매년 거란에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보내며, 송의 황제가 거란의 황태후를 숙모로 대우하기로 하였다. 막대한 송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전연의 맹약 내용이 어느 정도로 부담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나, 군사적으로 거란이 송을 제압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송을 제압한 거란이 고려에 대해 한층 압박을 가할 가능성은 상존했다. 그러나 일단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전쟁이라는 상황까지 발생하기에는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이 계기는 외부적으로 고려와 여진의 갈등이 커지고 내부적으로는 고려 중앙에서 정변이 발생하였던 1009(목종 12) 무렵 결국 만들어지고 말았다.

우선 고려 내에서는 1009(목종 12)에 이른바 강조의 정변(康兆-政變)’이 발생했다. 아직 젊고 아들이 없었던 제7대 국왕 목종(穆宗)이 병이 들면서 후계자 선정이 문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강조라는 장수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해하고 새로 현종을 옹립했던 것이다.

고려는 일단 거란에 사신을 보내서 전왕이 사망하여 새로운 왕이 즉위했음을 알렸고, 이 문제는 약 1년 동안 별다른 외교적인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넘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당시 변경 지역에서 고려군과 마찰을 빚은 일부 여진족이 거란으로 도망쳐 피해를 호소하면서 고려의 정변 소식을 알리자 문제가 발생했다. 거란의 황제 성종이 대역을 일으킨 죄인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고려 침공을 지시한 것이다.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이를 수습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전쟁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거란 성종의 궁극적인 목표가 강조 제거가 아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10(현종 원년) 11, 거란의 성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40만 대군이라 칭하며 고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고려는 당시 강조의 지휘 하에 30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거란군의 진격로 상에 위치한 변방의 각 성들도 전투를 준비하였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다. 양규(楊規)가 이끄는 고려군은 흥화진을 지키며 수차례에 걸친 거란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에 거란군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잔류시키고, 나머지 반으로 개경을 향해 내려갔다. 일차적으로는 고려가 성공적인 방어를 했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흥화진을 우회한 거란군이 다음으로 고려군과 마주친 곳은 통주(通州)였다. 바로 강조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강조는 먼저 자리를 잡은 지리적 이점에 검차(劍車)를 이용한 전술 활용으로 초반에 잘 방어하였지만, 후반에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방심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결국 통주전투(通州戰鬪)에서는 강조뿐만 아니라 부장 이현운(李鉉雲) 등 다수의 장수들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병력도 큰 피해를 입고 흩어졌다.

다행히 통주성(通州城)은 함락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주력부대가 무너지면서 고려군의 전열은 크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비록 서경(西京)은 힘겨운 전투 끝에 지켜낼 수 있었으나,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려 국왕 현종은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피난길에서 현종은 갖은 고초를 겪었고, 거란군에게 점령된 개경도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현종은 결국 친조(親朝), 즉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고,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하였다. 거란군도 후방에 잔류한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고려의 요청을 비교적 수월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란군의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양규를 비롯하여 후방의 고려군이 곳곳에서 거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거란군에게 사로잡힌 수많은 포로를 구출하며 거란군을 괴롭혔다. 비록 양규가 전투 도중 목숨을 잃는 등 고려의 피해도 컸으나, 끝까지 거란군에 대해 공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3차전쟁

2차 전쟁이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양국 관계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고려측에서 현종의 병환으로 인하여 친조가 불가능하다고 통보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많은 타격을 입혔다는 자신감에서 그랬던 것일까. 여하튼 고려는 이러한 입장을 표명했고, 거란의 성종은 크게 분노했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원정을 이끌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큰 피해를 입고 끝나버린 셈이 되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려가 이런 입장을 밝히자, 거란 성종은 고려에 강동 6주 지역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가 이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거란에서 무력으로 이 지역을 빼앗으려 하여 국지적인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고려는 현재의 의주(義州) 지역을 빼앗기는 손실을 입었으나, 그 외에는 대체로 잘 막아낼 수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거란 성종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고려 공격을 준비했다. 1018(현종 9)에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의 병력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소배압은 1차 전쟁 당시의 사령관이었던 소항덕의 형으로, 2차 전쟁에서는 선봉을 맡은 바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3차 전쟁 당시의 사령관을 소손녕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오류이다. 소배압과 소항덕은 거란 황실의 부마였고, 송과의 전쟁 등에서 많은 전공을 쌓은 노련한 장수들이었다. 당시 거란이 고려와의 전쟁에 상당한 전력을 투입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거란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해 고려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현종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으로, 강민첨(姜民瞻)을 부관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에 약 208천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선으로 투입했다. 거란군은 공략이 어려운 흥화진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향하려 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군이 지나는 길목인 흥화진 인근의 삼교천(三橋川)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이 때 강감찬이 소가죽으로 물길을 막았다가 터뜨려 거란군을 혼란에 빠트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번 전쟁에서 거란군은 다른 지역을 공략하지 않고 개경으로 직접 향하는 전략을 짰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군이 고려군의 주력이 배치된 곳을 피하여 개경으로 향하자, 강감찬은 그 길목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계속 습격하는 한편, 급히 개경으로 1만의 군사를 보내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동북면에서 온 33백의 군사들도 개경 방어에 합류하여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현종이 성 밖의 백성들을 전부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청야전술을 펼치며 방어전을 준비하였다.

소배압은 최대한 신속하게 개경을 습격하려 했으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고려군에게 피해를 입으며 상당한 전력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 인근까지 접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척후로 보냈던 기병 3백이 금교역(金郊驛)에서 고려군에게 전멸당하자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변변한 거점도 마련하지 못한 채 한반도 깊숙이 들어왔던 거란군이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고려군은 연주(漣州)와 위주(渭州) 일대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이어 1019(현종 19) 2월의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고려는 거란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거란군이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고 한다. 이 패배로 소배압이 귀양형에 처해질 정도였으니, 그 패배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3차 전쟁이 끝난 뒤에도 거란 성종은 다시 고려를 침공하려는 의도를 밝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도 강한 반대 의견에 부딪혔고,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사대 관계를 회복할 것을 청하니 명분도 없어서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양국 간의 오랜 전쟁은 끝이 났다.

거란의 거듭된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는 한층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거란도 고려를 힘으로 누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거란에게 압박을 당했던 송은 고려의 국력을 재평가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재편 속에서 고려는 거란 및 송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며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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