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 한국사 주요사건 요약 (1877~1882)
조선 (1877년 ~ 1882년)
[1877년]
태정관지령 (일본)
- 1877년 3월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한 공식 문서.
[1880년]
통리기무아문
- 조선에서 본격적인 개화의 흐름은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에 맞추어 변화를 이끌고 근대적 내정 사무를 관장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
-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여기서 군국기무란 국가의 군사 업무와 일반 국정을 뜻한다. 즉 통리기무아문은 당시 조선의 정치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통리기무아문은 대신(大臣) 중에서 총리(總理)를 마련하고 통제하거나 정무 보는 것을 의정부와 같게 할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자랑함.
제2차 수신사(김홍집) 일본 파견
<1876년에 파견된 1차 수신사 김기수 등 75명은 일본의 정치ㆍ군사ㆍ교육ㆍ문화 시설들을 시찰하였다. 김기수는 기행문 <일동기유>에서 일본의 문물과 서양의 기술ㆍ문화 수용을 주장하였다. 1880년에 이루어진 2차 수신사 파견에서는 김홍집 등이 일본의 군사ㆍ교육ㆍ산업 시설들을 시찰하였다. 이 시기에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신문화 수입과 외교 정책을 건의하였다>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 1881년(고종 18년) 일본의 시찰단 파견 권유(내지는 요구)는 계속 있어왔지만, 강화도 조약(1876)과 통리기무아문(1880)의 설치, 조선책략의 반향과 영남 만인소사건등으로 서구식 개혁에 대한 조선 국내 여론이 나빠지자 조선 정부는 1881년이 되어서야 비밀리에 조사시찰단을 파견
- 개화파로 구성된 박정양을 포함한 60명이 파견되었으며, 비밀리에 파견되었기에 암행어사의 신분으로서 부산을 통해 뱃길로 도쿄로 감
영선사(1881~1882)
- 조선 말기 개화기에 중국의 선진 문물(무기 제조법)을 견학하기 위해 젊은 유학생들을 거느리고 건너가 청나라의 무기제조법 등을 배워오고, 미국과의 수교문제(聯美論)에 관하여 사전 조율하기 위해 중국을 다녀온 사신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 1881년 영남지방의 유생 1만여 명이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낸 상소.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5/22)
-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외교관계를 가지게 됨
임오군란 발발(7/23)
-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8/23)
- 조선의 주정사(奏正使) 조영하(趙寧夏)와 청나라의 직례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 사이에 체결된 조선과 중국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
- 일본 상인과 청 상인의 상권 경쟁 더욱 심화.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8/26)
제물포조약 (8/30)
- 임오군란으로 인한 배상문제를 다룬 제물포 조약이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서 맺어짐.
* 제물포 조약 이후 일본 제국으로 파견된 박영효가 태극기를 배 안에서 고안해냄.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 분화
분 파 | 개화 방법 | 개화 모델 | 별칭 |
급진 개화파 | 급진적이면서 강경하게하는 개화 (문명개화론) | 일본의 메이지유신 | 개화독립당 |
온건 개화파 | 점진적이면서 온건하게 하는 개회 (동도서기론) | 청나라의 양무운동 | 사대수구당 |
다음 회차에는 조선 1883년 이후 사건에 대해 다룰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