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 한국사 요점정리_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1820 ~ 1898)

 

[왕권강화와 개혁]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즉위(1863) 이후 수렴청정을 통해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펼친다.

그는 우선 능력 위주의 인재를 등용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고, 비변사를 폐지, 정부(정치)와 삼군부(군사)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등의 법전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호포제(동포제)로 개혁하고, 환곡제를 사창제(면민의 공동출자 운영)로 개혁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정리를 단행하였다. 원래 서원은 선현에 대해 봉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누려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제사 비용의 명목 등으로 백성을 수탈하여왔다.

흥선대원군은 사액서원 중 47개소만 남기고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와 6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였다.(1871)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이 시기에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서역 상품의 유입(철종 때 프랑스 선교사 국내잠입, 포교활동, 서양 상품의 불법 유입 등)

초기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관대하였으나 유생들의 반발 및 교섭 실패 등으로 탄압정책으로 전환

1866(병인박해) 9명의 신부를 포함하여 수천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다.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다.

* 한성근(문수산성), 양헌수(정족산성) 부대의 활약으로 격퇴, 프랑스 철수과정에서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를 비롯한 귀중한 문화재 약탈함

1866(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였고, 평안감사 박규수와 평양 군민들이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다.

1868(오페르트 도굴 사건)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통상요구를 조선 정부가 거절하자, 충남 덕산의 남연군(흥선대원군 아버지) 묘의 도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71(신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통상을 요구해 오지만 조선은 이를 거부한다. 이에 미국은 강화도로 진입하여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하게 된다. 이때 조선 어재연의 활약(광성보 전투)과 조선수비대의 갑곶 등지에서의 승리를 통해 미국은 결국 철수하게된다.

두 차례의 양요 후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나타내는 척화비(1871)를 전국 각지에 설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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