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직장인 한국사 요점정리_ 정조

  정조 ( 재위기간 : 1776 ∼ 1800)   영조 28 년 (1752 년 ) 사도세자 ( 思悼莊獻世子 , 1735~1762) 와 혜경궁 홍씨 ( 惠慶宮 洪氏 ) 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형인 의소세손이 어린 나이에 일찍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다 . 1752 년 ( 영조 28 년 ) 에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왕세손 ( 王世孫 ) 으로 책봉되었고 1762 년 ( 영조 38 년 ) 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로부터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 ( 孝章世子 ) 의 후사가 되어 왕통 ( 사위 ) 을 이었다 . 1775 년 ( 영조 51 년 ) 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1776 년 ( 영조 52 년 ), 할아버지 영조가 83 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만 23 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 년간 재위하다 1800 년 ( 정조 24 년 ) 에 49 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정조가 임금으로 있으며 한 일들은 아래와 같다 .   영조를 이어 탕평책 실시 규장각 (1776) 을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기구로 삼음 친위 부대로 장용영 설치 (1785) 신진 인물이나 중 ⋅ 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 실시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1794~1796) 정치적 , 국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 상공인을 유치하여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 수원 화성은 실학자인 정약용이 거중기를 제작하여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 또한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배다리 ( 주교 ) 도 설계하였다 . 수원 화성 인근에 입주한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만석거 저수지를 만들고 , 국영농장인 대유둔전을 설치하여 화성 경비를 충당하였다 . 경제적으로 육의전 이외의 시전에 대한 전매 특권 ( 금난전권 ) 을 폐지하고 각종 상품에

조선직장인 한국사 요점정리_ 영조, 사도세자

조선직장인 한국사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해 다뤄 보았다.    영조 ( 재위기간 : 1724 ∼ 1776)   영조는 1699 년 ( 숙종 25) 연잉군 ( 延礽君 ) 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 ( 金昌集 ) 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 ( 寧嬪 )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다 .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 이복형인 왕세자 ( 후일의 경종 ) 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 를 받았다고 한다 . 당파간의 갈등속에 왕이 된 영조는 정치적 조정력을 통해 어느 붕당이든 간에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하였다 . 영조는 우선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막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몰아 내고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 을 펼쳐 나갔다 . 영조는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한양의 성균관에 붕당간의 다툼을 금하는 탕평비 를 세웠다 (1742).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 먼저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균역법 ( 군포를 1 년에 2 필에서 1 필로 줄여줌 ) 을 시행하였고 , 형벌제도를 완화하여 지나친 형벌 및 악형을 금지 , 신문고를 부활 하여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였다 . 법전인 ‘ 속대전 ’ , 의례서인 ‘ 속오례의 ’ , 역대문물을 정리한 백과사전 ‘ 동국문헌비고 ’ 등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 서울 도성과 관련해서는 준천사를 설립 (1760) 하여 청계천을 준설 (1760~1773)   ※ 사도세자 영조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 정실 아내는 혜경궁 홍씨 ( 헌경의황후 ) 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 아버지와 오랜 갈등 끝에 만 27 세의 젊은 나이로 7 월의 한여름 땡볕 삼복더위에 쌀 담는 뒤주에 갇혀 8 일 만에 굶어 죽은 것 , 즉 임오화변 으로 유명하다 . 영조는

조선직장인 한국사 요점정리_ 숙종, 경종

  숙종 ( 재위기간 : 1674~1720)   조선후기 숙종은 인사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책을 제시하였다 .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3 차례의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 경신환국 (1680) : 유악 ( 기름먹인 장막 ) 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남인 ( 허적 , 윤휴 등 ) 을 몰아내고 집권했고 ,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은 노론 ( 강경론 ), 소론 ( 온건론 ) 으로 분화함 - 기사환국 (1689) : 남인이 원자 ( 장희빈 소생 ) 를 정하면서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했고 , 송시열 등은 사사되고 장희빈은 왕비로 책봉됨 - 갑술환국 (1694) : 인현왕후 ( 서인 ) 복위와 장희빈 강등 관련해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집권함 환국은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했다는 평을 받고 있고 , 왕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 이때 강화된 왕권을 통하여 마지막 5 군영인 금위영 ( 궁궐방위 ) 을 설치 (1682) 및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1712) , 대동법을 최종적으로 완성 (1708) , 상평통보 (1678) 를 발행 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   경종 ( 재위기간 : 1720 ∼ 1724)   경종시대 왕권은 미약했고 노론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다 . 등극 얼마지나지 않아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1721 년 이복동생인 연잉군 ( 후일 영조로 등극 ) 을 세제 ( 世弟 ) 로 책봉한 뒤 다시 노론이 그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 하지만 이때 소론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대리청정을 수차례 번복하였다가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를 물리치고 친정 ( 親政 ) 을 하였다 . 경종이 즉위한 이후 2 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화 (1721~1722) 로 노론이 제거 되고 , 소론이 집권 한다 .  ※ 신임사화 :  조선 시대 경종 1 년 ( 신축 辛丑 년